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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 명   손용수 개인전 - 사는 일 Work of Life
       전 시 작 가  :
  손용수
       연계프로그램 :  
       작성일 : 2023-08-12        조회 : 459
  첨부파일  :  [크기변환]손용수 개인전.jpg [ 139.0K ]( Download : 89 )


손용수의 회화 여정: 비움의 깨달음에서 채움의 열망으로

 

심상용(서울대학교미술관 관장)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우리는 진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그 무엇을 받아들일 자세를 하고 있어야 한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

에릭 스프링티드, 시몬느 베이유

권은정 옮김(칠곡: 분도출판사, 2008),p.132.

 

공성(空性) 정진의 미학

 

손용수는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고, 그것은 그의 회화형식의 변화를 이끄는 계기로 이어졌다. 손용수는 이전 상당 기간 불가(佛家)의 사상에 심취했다. 형식과 색, 기법과 터치, 톤 등, 그의 회화 전반에 불가의 사유와 인식이 녹아들었다. 감각의 과정을 밟지 않는 심상표현(心象 表現)이니만큼, 대체로 추상의 형식을 띠었다. 2010년대의 <호법신>(護法神) 연작, <TENT> 연작, <공성>(空性) 연작 모두 이러한 맥락을 공유한다. 호법신은 용맹스러운 장수의 모습으로, 불가의 법을 수호하고 인생의 도상에서 중생들의 깨달음을 돕는다. 2018년 작 <둘도 없고 다름도 없다>에서 캔버스 전체를 덮은 주황색은 중생 제도의 밝은 기운을 상징하는 불가의 고유색이다. 2017년의 <공성>(空性) 연작에서는 이 미학의 지평에 향후에 일어나게 될 변화의 미세한 조짐이 감지된다. 징후는 2016년의 <세상을 등지고> 연작에서 이미 시작된 것 같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부을 듯 먹구름이 두텁게 드리워져 있고, 대지는 사방 분간이 어려울 만큼 어둡다. 간신히 수평선에 의존하는 두 세계, 하늘과 땅의 분간마저 용이하지 않다. 폭풍전야의 조짐이랄까. 무엇보다 구름과 대지의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자. 묘사나 서술은 여전히 부재하지만, 재현적 형상의 귀환, 그때까지 일관되었던 추상의 기조를 흔드는 사실의 귀환이기에 그렇다.

<공성>(空性) 연작은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세상을 등지고>의 연장이다. 영어 단어 ‘emptiness’로 대변되는 공성은 부처의 주요 통찰력 가운데 하나다. 굳이 불가의 깨달음이 아니더라도, 인생의 문제들을 야기하는 근원적 출처인 마음이 큰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은 이제 경험 이성으로도 모르지 않는 바다. 마음의 혼란에서 오는 환상과 허상에서 벗어남, 그 부재의 상태, 존재의 진정한 실체와 마주하도록 하는 떨쳐냄이나 비워냄의 상태가 공성의 부재인 것이다.

옳다. 우리의 눈은 세계의 본래 모습, 사물의 실체에 충분히 다가설 수 없다. 눈은 본다고 믿을 때 더 많이 잘못 본다. 이성은 만물의 실제적 존재 방식을 파악하는데 이르지 못한다. 마음은 환상과 허상으로 크게 어지러운 상태다. 누군들 춤을 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인생 길을 걷고 싶지 않겠는가? 심지어 니체조차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열 배나 더 나은 인간이 되거나 설사 프랑스의 몽상주의자 샤를 푸리에가 꿈꿨던 광란의 성() 해방국을 실현시킨다 하더라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프랑스의 시몬느 베이유에 의하면, 우리 존재에 운명적으로 작용하는 중력으로 인해 그렇게 할 수 없다. “인간은 혼자 힘으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진리를 찾아 나선 인간은 거짓과 위선을 만나게 될 따름이다.” 눈을 감고, 이성을 해체하고, 마음을 내려놓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존재와 존재 너머를 향하여

 

비우기, 곧 공성의 맥락에서 보면, 2023년의 <향하여> 연작은 급진적 일탈에 가까워 보인다. 목탄의 물성에서 오는 메마름과 갈증의 뉘앙스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점이 이전과 다르다. 부재에서 존재로의 급진적 선회, 자신의 두 발로 대지를 딛고, 두 눈으로 세상을 보기를 선택하는 선회, 비움의 명상에서 채움으로의 선회가 두드러진다. , 이야기, 깨달음의 기관으로서 신체를 더는 마다하지 않으리라는 다짐, 설사 그것이 마음의 혼란에서 연유하는 허상의 일환일지라도 희망하기를, 상실하기를, 심지어 아픔이요 고통일지라도 피하지 않으리라는 다짐....

손용수는 공성(空性)의 깨달음을 지난다. 공성은 그에 있어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라 과정이었던 셈이랄까. 이제 손용수의 회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회화는 세상을 등지는 깨달음의 방편에서 세상 속으로 향하는 약속의 표지(標識)로 이행한다. 이야기는 새롭게 쓰여지고, 이전과는 다른 뿌리를 지닌 것으로 새롭게 구성된다. 그 뿌리에서 새로 돋아난 것은 비움이 아니라 충만함에 관한 서사(序詞). 사랑의 충만함! 찬란한 빛, 그리고 낮고 낮은 대지를 가로지르는 한줄기의 시냇물이 등장한다. 이야기가 바뀌면 형식도 따라 바뀐다. 이제 추상미학이 재현미학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때다. 실재가 귀환하고 삶이 복원되는 시간이다. 신학이 미학을 바꾸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여기서 미학은, 형태학은, 색채학은, 조형론은 신학적 전망을 따라 재배치된다.

벌거벗은 남녀는 생기가 넘친다. 이 생기는 그들 사이에 세워진 질서, 수직의 검정 기둥과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그 안에서 사랑이 언약으로 승화하는 일자(一者)의 표상임이 분명하다. 물에 빠지고 고난에 처할 때도 변함이 없는 구원의 방주가 되는 일자다. 궁극, 절대자의 이름, 플라톤(Platon)의 최고의 이데아, 플로티노스(Plotinos)의 근원적 실재... 무엇보다 갈망하는 이에게, 갈망하는 이들이 있는 낮은 곳으로 기꺼이 내려오는 신, 곧 사랑의 신의 조형적 메타포다.

남자는 그것을 등에 진 채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달린다. 베이유가 말하는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진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그 무엇을 받아들이는 자세. 그것을 어깨에 진다는 것의 의미는 생각에 빠지지 않고 비워둔 채 우리 자신을 열어놓는 것이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갈망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충분한, 무겁지 않은 멍에다. 우리가 진리를 향해 오르는 것이 아니기에.

 

신을 향한 강한 열망만이 낮은 데로 신을 내려오게 할 수 있다. 신은 갈망하는 이에게만 온다.” 앞의 책, pp.131-132.